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섬 15










 “슬슬 그 오피스텔도 정리하는 게 낫지 않겠니?”







식기끼리 서로 부딪혀 달그락 소리만 날 뿐 대화라고는 전혀 없던 식사시간의 침묵이 깨진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잠깐만 시선을 뒀다. 곧장 눈을 내리깔고는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입술로 가져간다. 여전히 지민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보란 듯이 천천히 음식을 곱씹는다.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그 의도와 저의를 파악해야 하는 관계를 정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나. 스치듯 그런 생각을 한다. 오피스텔이라고 불려진 곳은 지민이 지난 몇 년간 스스로를 억눌러간 끝에 겨우 얻어낸 작은 보상과도 같은 곳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지민의 말은 곧장 목적을 의심 당했지만 남자친구까지 생긴 후 꺼낸 말이라 그 의심이 오래가진 않았다.







오피스텔로 이사를 하던 날 지민은 몹시 기뻤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순수하게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일 년도 안되는 시간을 살았을 뿐이지만 지민은 서슴없이 그 곳을 ‘집’이라고 불렀다. 그 곳만을 집이라고 여겼다. 아주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힘으로 얻은 오피스텔이 아니었으니 지민은 절대 빚을 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빚을 진 것이었다. 그래도 지민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제 그 정도 뻔뻔함은 있었다. 오피스텔은 지민에게 일종의 뒤늦게 지불 받은 정산금 같은 것이었다. 정신적 자유를 내주고 간신히 받아낸 신체적 자유 같은 것.







“곧 있으면 결혼도 하는데 굳이 나가 살 필요가 있어?”







지민의 의도된 침묵에 한 번 더 말이 날아든다.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본가로 돌아와 머물고 있으면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닌지 걱정해야 맞지 않나 싶은데. 역시 이런 것도 이제는 기대하는 사람이 우습지.







“말씀대로 곧 있으면 결혼할 거니까 그 때 정리할게요.”

 






식탁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부딪힌다. 지민은 눈에 힘을 주고 물러서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리 싸워도 결론이 나질 않는 소모적인 싸움이라 서로 어느 선 이상은 넘지 않게 된 지도 꽤 됐다. 그것도 결정적인건 전부 지민이 숙이고 들어갔기 때문이었지만. 먼저 눈을 돌린건 지민의 엄마 쪽이었다. 그 뒤로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지민은 먹던 밥을 마저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잠시 고개를 들어 식탁의 풍경을 바라봤다. 눈에 담겨지는 모든 것을 하나의 사진처럼 눈으로 꾹 찍어낸다. 과거의 어떠한 일이 계기가 되어 끝도 없는 평행선을 달리게 된 사람 둘과 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날 선 대화가 오가든 말든 관심도 두지 않고 핸드폰만을 들여다 보는 사람 둘을 가슴 속에 박아둔다.







섬 같다.


지민은 그 순간 어떠한 상상을 했다. 여기는 섬이야. 아무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섬. 지독하게 잔인하고 지독하게 외로운 섬.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네 사람은 모두 그러한 섬에 갇혀버린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용기 있게 섬에서 탈출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섬 밖의 바다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당장의 안도하는 삶을 선택한 추레한 겁쟁이들. 그리고 그 겁쟁이 중에는 당연히 지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민정과의 관계가 복잡해지자 도망치듯 그 날 바로 본가로 들어온 사람은 유지민, 자신이었으니까. 지민은 이럴 때가 싫었다. 이들과 자신이 닮아있다는 것을 기어이 확인할 때가 싫었다. 한 때는 이들과 다름을 선언하고 탈출을 꿈꿨으나 처참하게 패배한 후로 지민은 순간순간 이들에게서 자신을 봤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봤다.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그 자신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됐다. 지민은 말처럼 스스로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는 삶을 살았다. 얼마 전 민정이 지민의 삶에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는.







결국은 다시 김민정이다.







생각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민정에게 그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은지도 벌써 수일이 흘렀다. 민정을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지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쳤다는 감정도 순간적인 기분은 아니었다. 지민은 말 그대로 완전히 지쳐버려서 일단은 그 집에서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김민정 생각을 조금이라도 덜 해보고 싶었다. 그 짧은 사이에 집에는 너무 많은 김민정이 묻어있어서 그 어디를 봐도 김민정이 보였기 때문에, 본가에서 차분하게 처음부터 다시 스스로의 감정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자신에게는 이제 그 어디에도 도피처가 없다는 사실을 지민은 여기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깨달았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해보려 해도, 아무리 다른 감정을 품어보려고 해도 결국은 김민정이었다. 몇 번이고 민정에 대한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의 문제였다. 이미 지민은 너무 많은 것을 민정에게 내줘버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김민정을 떼어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모든 것이 지민으로 하여금 이번엔 진짜라고 말을 해오는 듯 해서 지민은 침대에 앉은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번엔 진짜야. 더는 안돼. 진짜로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미뤄둘 시간이 없어.







지민은 사실은 내심 미국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여겼다. 좋은 것은 없고 나빠질 일들만 있는 모든 수들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었다. 남자는 어쨌든 현재까지는 지민을 사랑했고, 지민은 그의 거만함과 선민의식을 경멸했지만 그게 아주 못 견뎌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가진 것에 비하면 그 정도 결함을 참아줄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 그는 이를테면 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섬에서 지민을 꺼내주겠다며 대형급까진 아니더라도 중대형급 크루즈선을 끌고 나타난 선주였다. 그는 지민을 어디든 데려가 줄 수 있었다.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었다. 지민이 그에게 착하고 예쁘게만 군다면.   







그리고 지민은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무엇 하나를 내주고 대신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는 방식이 이제 지민에게는 매우 익숙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 집을 벗어나기 위해서 지민은 남자에게 갇히는 길을 선택할 셈이었고, 끊겨버린 공부를 다시 한 번 해보기 위해 지민은 남자가 대학원 과정을 밟는 동안 챙겨먹을 수 있는 도시락을 매일 싸는 삶을 선택할 작정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순응하고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다들 그렇게 살잖아. 뻔한 그 한 마디가 차라리 위안이 됐다. 주류에 편입하는 삶. 지민의 주류는 심지어 남들보다도 훨씬 편안할게 분명했으니까. 언젠가의 누구들의 말처럼 그렇게 살다 보면 일시적인 감정으로만 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나 고등학교 때 잠깐 여자 만나봤어. 그렇게 가볍게 술자리에서나 얘기할 법한 경험이 언젠가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김민정이 나타났잖아. 또 나타나서 또 유지민을 사랑만 있으면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얼뜨기로 만들어버렸잖아.







남자에 비하면 김민정은.


그래 또 다시 김민정 생각인데.







남자에 비하면 김민정은. 아주 잘 봐줘야 어선이었다. 넓고 아늑한 선실도 화려한 연회장도 깨끗한 수영장도 없는, 좁고 불편하고 매일 같이 뱃멀미나 할게 뻔한 어선. 원양어선급도 아니었다. 연안에서 고기잡이 할 때나 겨우 쓸 만한 작은 배쯤 될까. 그 차이가 너무 분명했다. 이건 그 배를 이끌고 있는 선장이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지민에게 소중한 사람인지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민이 이제 그 정도의 머리는 굴릴 줄 아는 계산적인 사람이 됐다는 뜻이기도 했고.







사실 지민이 오래도록 꿈꿨던 일은 분명했다. 궁극적으로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이 곳에서 탈출하는 것.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 그래. 그래서 지민도 한 때는 구원을 꿈꿨다. 아무 것도 몰랐을 때는 민정을 자신에게 찾아온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여겼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그렇게 너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다고 몇 번이고 순진하게 중얼거렸겠지. 그렇지만 이제는 지민도 알았다. 완전한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설사 그런게 존재한다고 한들 그게 민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민정은 자신보다 어린데도 이미 그 사실을 고등학교 때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 떠나야만 했는지, 왜 지민을 섬에 내버려뒀어야 했는지를 천천히 고백해 오던 민정의 진짜 얘기를 듣던 날, 지민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덜 컸었구나. 민정은 그 때 이미 나보다 한참 먼저 커있었구나. 하고. 18살에 이미 민정은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때 이미 그걸 다 알았다. 사랑하는 마음 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걸 넘어서서 때로는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들 때문에 굳건한 사랑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민정은 지민을 곧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곤 했고 지민은 내심 발끈하며 그걸 반증해 보이듯 부러 더 어른스럽게 굴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지민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은 정말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 날 지민은 진심으로 민정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해버려서 힘들었겠다고. 너도 나만큼이나 너무 고된 사랑을 해왔었다고. 그렇게 위로해줄 수 있었다. 그 위로가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민정이 그 현실 때문에 날 두고 또 도망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막진 못했지만.







지민은 스스로가 답답했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선택지라곤 두 가지뿐인데, 그냥 두 가지 중에 하나만 고르면 되는 OX퀴즈 같은 건데 왜 이렇게도 어려워하는지 한심해서 말도 다 안 나왔다. 이런 생각도 저런 생각도 사실은 다 필요 없는 생각들뿐이다. 지민은 이제 정말로 그냥 두 갈래뿐이었다.   







보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볼 자신이 없어.


선택하고 싶어. 그런데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없을지 확신이 없어.


사랑해. 그런데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김민정도 나를 사랑해. 그런데 어디까지 나를 사랑할까.


민정과의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아닐 수 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그런데도 민정을 사랑한다면.







답답한 마음에 지민은 오랜 시간 꺼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오래 꺼두었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집을 버려두고 본가로 도망 온 것과 같은 이유로 꺼둔 핸드폰이었다. 먼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건 자신이면서 막상 민정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또 다시 민정이 잠깐의 밀어냄에 너무도 쉽게 밀리는 사람이라는걸 확인하게 된다면 정말로 그 때는 지민도 민정을 포기해 버릴까봐, 그래서 꺼놨었다. 전원 버튼을 꾸욱 누르고 있는 순간부터 마음이 떨려온다. 불합격일까 무서운 마음에 마지막의 순간까지 확인을 미뤄둔 대학 합격 홈페이지를 접속하는 순간이 이런 기분일까. 지민은 잠시 상상해본다. 대학에는 지원해본 적도 없으면서.







핸드폰 화면이 하얗게 밝아온다. 그대로 잠시 기다린다. 조마조마한 마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마음. 내가 내 힘으로 선택할 수 없다면 네가 내 선택을 도와줘. 그렇게 기대버리고 싶은 이기적이지만 솔직한 마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지민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지민의 눈이 놀란 마음으로 커진다. 지민이 바보처럼 미뤄만 두고 있던 시간 동안 한 켠에서는 쌓여만 가고 있던 것이 있었다. 쌓여있는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놓칠 뻔한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진다. 지민의 마음 속으로 쏟아져 내린다. 핸드폰은 한참을 그렇게 쉴새없이 진동하다 어느 순간 멈춘다. 지민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그것들을 하나씩 읽었다. 어떤 날은 길게, 어떤 날은 짧지만 간절하게. 어떤 날은 어른처럼 또 어떤 날은 해맑은 아이처럼. 어떤 날은 그리움으로 어떤 날은 사랑하는 마음만을 담아. 모든 문자는 하나하나가 모든 김민정이 된다. 정말이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쉽게 김민정으로 그려진다. 민정의 밀린 문자들을 보면서 떨려오는 것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지민의 마음도 있었다. 지민도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김민정은 아주 작고, 또 아주 나약하고, 또 아주 별 볼일 없는. 안 되는 이유는 여전히 많았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날 줄을 모르는 김민정이 지민을 향해 장난기 어린 얼굴을 짓는다.


그래서 유지민 이 배 안 탈 거야? 재밌을텐데. 우리 진짜 재밌을텐데.


곁에 있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말해올 것만 같아서. 내가 데리러 왔잖아. 널 구하진 못하겠지만 데리러는 왔잖아. 이번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안 보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부딪혀온 민정의 그 모든 진심들이 정말로 그렇게 말해오는 듯 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녹아 내린다. 지민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단단하게 굳어버린 감정들과 생각들이 민정이 타고 온 배가 몰고 온 새하얀 파도에 쓸려 내려가 버린다.







지민은 그 순간 깨달았다. 민정이 언제까지 날 사랑해줄 수 있을까. 민정이 날 다시 믿게 만들 수 있을까. 지민은 그런 생각들로 망설이고 서성였지만 사실은 이건 민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지민이 민정을 다시 믿어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였다. 지민이 한 번 더 민정을 믿고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관한 얘기였다. 결국은 그랬다. 이제야 깨달았다. 모든 것은 전부 지민에게 달린 것이라는 걸.







이걸 이 순간에 쓰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손에 꾹 쥐고만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지민은 침대 곁에 놓인 협탁 서랍을 연다. 언제 쓰일지, 쓸 수는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김에 손에 쥐고만 있던 것이 있었다.







우습지. 모두가 사랑하는 법을 잊은 섬 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또 다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게.


지민은 사진 하나를 손에 쥐고서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천천히 걸어 안방으로 다가간다. 어렵지 않게 안에 있던 사람과 얼굴을 마주한다. 지민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그가 누워있는 침대 곁자리에 들고 온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가 지민으로서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집 근처의 골목길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확인한 그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이해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지민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 사실을 손에만 쥐고 있을 뿐 감춰 뒀었던게 사실은 사랑이었나 생각해본다. 그렇게 미워했는데 그래도 싫어할 수는 없었나. 스치듯 떠올린다. 그러나 금세 지워버린다. 지민에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도 이제는 더 없었다. 당장이라도 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민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었다.







구원은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랑은 있으니까.


틀림없이 후회는 하겠지만. 그래. 후회 좀 하면 어때.


지민은 사랑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김민정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 보기로 한다.


이게 유지민이 써낸 답안지였다. 정답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알게 뭐야. 어차피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는데.







“할 말이 있어요.”







언젠가는 엄마도 자신이 찾은 사랑을 위해 이 섬을 떠나게 될까. 지민은 잠깐 생각한다. 알 수 없었다. 그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가 결정할 일이었다. 지민이 결국 사랑 말고는 모든 것이 다 있는 섬을 박차고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유지민이 되기로 결정한 것처럼.










*****










민정은 며칠 내내 지민의 집에 있었다. 아르바이트도 아프다는 핑계로 죄다 빼놨다. 하루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보다 잠을 잘 때에는 거실 소파에 모로 누워 선잠을 잤다.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만 들려와도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그 발자국 소리의 끝이 지민의 집으로 향할까 봐. 언제 돌아올지 몰라 떠날 수 없다는 변명을 했지만 사실은 민정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지민의 집을 떠난다면 정말로 다시는 지민을 보지 못할까봐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걸. 그래서. 그래서 며칠동안 기다리고만 있던 연락이 마침내 왔을 때 민정은 곧장 핸드폰을 그 손에 쥐었음에도 바로 받지 못하고 잠깐 망설였다. 그 후에 들려올 말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민정아. 어디야.


“나…언니 집.”


망설이다 내뱉은 말 끝에 지민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민정아, 거기 이제 내 집 아니야.


수화기 너머 지민의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무슨 뜻인지 몰라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민정에게 지민은 약간은 큰 소리로 다시 말을 했다.


-김민정. 빨리 집으로 와. 나 이제 너랑 엇갈리기 싫어.  


이 곳이 지민의 집이 아니라면 두 사람에게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아직도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지민이 웃고 있으니까. 웃는 목소리로 빨리 오라고 말을 해왔으니까. 그래서 민정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내달렸다. 지민이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민정아.”







어떻게 이렇게 이 사람은 매번 손쉽게 나를 발견하지.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인데 이미 지민은 민정을 보고 있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앉아있었는지 눈과 입술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 웃음짓는 그 얼굴이 발갰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있지. 지민에게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이미 차오를 대로 차오른 숨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저 바보 같은 사람을 사랑해. 민정은 어쩔 수 없이 또 생각한다. 저 사람이 없는 순간은 이제는 단 한 순간도 상상할 수 없다고. 저 입에서 설사 그 어떤 아픈 소리가 나오더라도 이제는 내가 포기가 안 될 것 같다고.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때 지민은 민정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하얀 얼굴이 너무 좋아서, 빨리 오랬다고 진짜 빨리 와버린 그 솔직함이 못 다 말할 만큼 사랑스러워서. 난 정말 얘가 아니면 안돼. 정말로 지금은 아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김민정이 아니면 안되겠어. 정확히 그런 생각을.







그래서 그 마음 그대로 민정에게 걸어가 아니 날아가듯 뛰어가 민정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품에 안았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 안고 속삭였다. 나 다녀왔어.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심한 민정도 눈을 꾹 감으며 대답한다. 응, 어서 와. 품에 파 묻힌 채 웅얼거리는 민정의 목소리는 어쩐지 귀보다도 심장에 더 빨리 닿는 듯 해서. 지민은 그게 좋았다. 이 목소리를 이대로 가슴에 새겨두고만 싶어 그저 더 꽉 껴안는다.










*****










“나 있잖아. 차라리 너랑 어디 섬으로 도망가자고 할까도 생각 해봤어."


“언니는 진짜 왜 이렇게 도망가는걸 좋아해.”


“그러게.”


잠깐의 키득거림.







“민정아, 나 이제 돈 없어.”


“괜찮아. 난 원래부터 돈이 없었어. 내가 언니 돈 때문에 만난 건 줄 알아?”


“…그럼 뭐 때문에 만났는데?”


“…착한 마음?”


“…속아줄게.”


“그래. 착하다.”


또 한 번의 키득거림.







“민정아. 나 이제 공부 할거야.”


“응, 이번에는 내가 과외 해줄게.”


“민정아.”


“응.”


“근데 나 이제 정말로 너 밖에 없어.”


“언니. 난 고등학교 때부터 언니 밖에 없었어.”


그 말 끝에는 지민은 참을 수 없어 민정에게 먼저 키스를 했다.







민정이 어느 순간 물었다.


“그런데 집에서 어떻게 나왔어?”


지민은 숨기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아무도 사랑하면 안 되는 섬인데도 사랑은 참을 수 없나 봐. 꼭 반드시 사랑은 찾아 오나 봐.”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빌미로 협박을 했다는 소리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을 끌어안으며 지민은 다시 웃으면서 말을 했다.


“뭐.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다음은 다음에 생각할래.”


대책 없이 그렇게 굴어버린다.







“언니.”


“응?”


아무런 미움도 아무런 원망도 없이 사랑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 민정은 목이 매어올 것만 같아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그 눈에다 대고 말을 했다.


“사랑해.”


지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대답하지 못한다. 앙다문 입술 아래로 목 울대가 울렁거린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민정은 이제야 먼저 말해 미안하다는 말 대신 한 번 더 힘을 주어 말을 했다. 자신이 담을 수 있는 모든 마음보다도 조금 더 눌러 담은 진심을 건넨다.


“유지민.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민정아.”


지민은 더이상 울지 않았다. 맑게 웃었다. 그래서 민정도 마주 보며 웃었다. 앞으로는 웃을 날이 더 많을게 분명했으니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섬. 그런 섬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런 섬이 있다고 한들 누군가는 분명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서로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는 계속해서 사랑만을 해나갈 생각이었다. 그 어떤 망망대해가 펼쳐져도 결국은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는 두 사람만의 섬을 찾기 위해. 영원은 없겠지만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에 그래도 미련하게 한 번은 기대를 걸어보기 위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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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 Antifr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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